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마 18:21-35][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용서하다’라는 말의 원어가 가지는 기본 의미는 ‘내보내다’, ‘버려두다’ 이다.
우리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우리의 기억 밖으로 ‘내보낸다’ ‘버려둔다’ 의미가 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보다 더 크고 놀라운 ‘절대적 사랑’이다.
바로 “아가페 사랑”이다. 아가페 사랑 주었으니 아가페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아가페 용서를 해 주었으니 아가페 용서를 할 수 있다.
A. 세상 용서와의 차이점
-. 세상에서는 상대방이 자기잘못을 깨닫고 사과를 하거나 변상을 하면 용서해준다.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상대방의 마음과 태도를 보고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상대방의 마음이나 행동과 상관없이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신 주님의 사랑 때문에 무조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용서하는 것이 용서다.
예화: 탈무드에 나오는 용서와 복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웃집에 가서 낫을 빌려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며칠 뒤, 그 이웃이 호미를 빌리러 왔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호미를 챙겨주었습니다.
이웃이 가고 난 후 아들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은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빌려주어야 하나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그 이웃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우리도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복수와 미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행동이 어떠했든지 상관없이 필요할 때 도울 수 있는 것은 “용서며 사랑” 이란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은 우리였다.
왜 우리가 용서해야하는가?
나 같은 죄인을 뭍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의 모든 죄를 먼저 용서해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우리 모든 죄를 먼저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반응이 나타나야 한다.
용서란 주님께 받은 사랑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용서하며 살기를 원하고 계신다.
B. 베드로가 한 질문의 뜻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나아와 질문 하나를 하게 된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당시 이스라엘의 랍비들과 서기관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잘못한 것에 대해서 3번까지는 용서할 수 있지만 더 이상은 용서할 수 없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은 자비하신 분이니까 일곱 번 정도 용서하라고 하실까?”생각하고 질문했다.
사실 ‘베드로가 일곱 번까지는 용서해 줄 수 있다고 말을 하는것’도 대단히 놀라운 말’ 이다.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님은 더욱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
이 말씀은 490번만 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무한정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왜 무한정 용서해야 하는지 재물이라는 것이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고 이해하기가 쉬우니까 그러셨다.
[우리도 가끔돈으로 설명 _ 비유는 명백한 사실과 진리를 더욱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데 사용 된다.]
C. 재물을 통한 비유
어떤 임금이 그 종들과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자를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는데 그 탕감 받은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빚을 갚으라고하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동관의 청을 허락지 아니하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게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만 달란트 탕감해준 주인이 그 종을 불러다가 32-34절대로 하시면서 우리에게 35절의 교훈을 주셨다.
[마 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빚진 자에게 용서란?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다.
탕감이란 채주가 받아야 할 것을 받지 않고 없는 것으로 해주는 것으로 채주는 그 규모에 상관없이 무조건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사용된 탕감은 용서와 같은 의미이며 결코 쉬운게 아니다.
비유에 나온 금액을 우리 시대에 맞게 설명해 드리면,
- 1 달란트 = 6,000 데나리온
- 1 데나리온 = 노동자의 하루 품삯 = 약 10만원
- 일만 달란트 = 10,000 × 6,000 × 100,000 = 약 6조원
- 백 데나리온 = 100 × 100,000 = 약 1천만원
- 6조원 : 1천만원 = 60억원 : 1만원 = 6억원 : 1천원 = 아파트 2채 : 과자 1봉지
25절‘갚을 것이 없는지라’ = 빚은 졌는데 갚을 상황이 못되는 것.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은 하나님 앞에 죄인 된 우리 자신의 모습과 같은데,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없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지옥에 떨어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27절‘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노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받지 않겠다는 주인.
이것은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없고 지옥 형벌을 받아 마땅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 피로 죗값을 갚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준다.
이제 상황은 바뀌어 주인의 집에서 나가면서 자기에게 빚진 사람을 만나게 된다.
30절‘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하나님 앞에서 정말 많은 죄 그리고 정말 큰 죄를 용서받은 우리가 용서받은 것의 60만 분의 1에도 못 미치는 하찮은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모습이다.
여러분들이 6억 원의 빚을 탕감받았는데 바로 나가서 1천 원 빚진 자를 만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할 것 같은가? 너무 기뻐서 ‘됐어..안갚아도돼..’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31절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종을 용서해 주지 않고 감옥에 가두는 것을 다른 동료 종들이 지켜보고 심히 민망하게 여겼다.
빚진자를 매우 딱하게 여겼고, 매우 슬프게 여겼다. 그래서 그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게 된다.
주인도 듣고 매우 딱하게 여기고 매우 슬프고 괴로워했을 것이다.
이에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을 불러다가 말씀하셨다.
32절‘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악한 종아. 탕감해주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다.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자를 만나 빚을 갚도록 요구하다가 주인에게 받은 탕감이 취소된 사례를 읽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에게 그의 죄사함을 번복하시겠다는 것이 아니고 죄사함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인정하시지 않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다.
일만 달란트는 사람이 평생 일해도 모을 수 없는 돈이다. 이는 인간의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의 심각성을 보여주기 위한 비유로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며 우리의 죄는 자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 빚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준 임금보다 더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의 값진 피를 흘려서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다.
1. 용서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 죄인이 하나님의 법을 파괴한 이래로 그 죄를 지은 인간을 용서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2. 용서의 근원은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왜 그리스도인은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일만달란트를 탕감 받고도 용서할 줄 모르는 자는 빚을 탕감 받을 자격이 없는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용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호리만한 죄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전부 죄값을 갚아주시고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
왜? 불쌍하니까. 그냥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로 마음 먹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다.
눅 23:3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는데도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엡 2:3~5] 전에는 우리도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용서하며 살기를 바라신다.]
3. 삶의 교훈
[골 3:12~14]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사람으로 지으신 것이지 하나님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다
▶ 먼저는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마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위 구절은 주기도문의 용서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설명하신 것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용서받아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함으로 자신이 용서받음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큰 죄에서 용서를 받았는데 조금 서운하게, 조금 화나게 한들 용서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제단에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형제와 화목하는 일을 먼저 하라고 말씀하셨다.
▶ 용서하지 못하면 생기는 일.
1) 마음에 평안이 없다.
[잠 19:11]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자기에게 불행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다.
원망하고 미워하고 불평하고 원한을 품고 있는 그 마음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남을 완전히 용서하고 악한 것을 기억지 아니하고 다 탕감해 주면 내 마음에 평안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2)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마 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만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막히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다.
남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다.
그 죄부터 회개하고, 형제에 대해 용서하고 주님께 나아가야 기도를 들으시고 교제가 회복된다.
용서와 사랑이 있는 사람은 마음속에 있는 복수와 증오[미워하는 마음]를 덮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속에하나님의 용서가 먼저 자리잡고 있기에 우리의 마음이 높아지지 않고 내가 어떠한 마음을 먹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경험했기에 타인을 용서 할 수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3) 마귀에게 속는 것이다.
[고후 2:10-13]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으면 마귀 궤계에 속고 있는 것이다. 속지 말고 살아야 한다.
용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셨다. 서로 간에 교제가 회복될 때 진정한 용서라고 할 수 있다.
[ 마5:45 ]“이같이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 고난과 영광, 용서의 사람 요셉 [요셉의 생애에 대한 기록 : 창 37: ~ 50:]
요셉의 인생가운데서도 여러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었다.
[창 45:5, 8] [5]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요셉은 형들에게 화내거나 따지지 않았다.
왜냐면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시 105:17~19]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 생활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 분노가 일어나는게 당연한 일이지만 만약, 분노가 일어난다고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이 무시되는 것에 대해 속상해하신다.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 화가 난다고 그것을 입으로 행동으로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계와 우리의 조급한 시계가 다른 것이니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고,
분을 그치고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자.
▶ 분을 그치고 보응을 하나님께 맡길 것
[잠 20:22]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 압살롬을 피해 도주하던 다윗이 자기를 독한말로 저주하던 시므이를 용서했던 것처럼 우리도 내가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자.
[삼하 16:6-8] 또 다윗과 다윗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왕을 저주한 시무이는 다윗이 돌아왔을 때 살아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통해서 다윗의 원한을 풀어주셨다.
[롬 12:19~21]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벧전 3:8~12]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복을 비는마음이 사랑이다]
[고후5:18]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화목’이라는 말은 원수관계에서 정상적인 관계로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 마무리[ 사랑은 무엇인가 ]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래 참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을 예수님으로 바꾸어읽어보자.
사랑이라는 말에 자기 이름을 넣고읽어보자.
어떻게 하는 것이 은혜 받은자가 해야 할 모습인지 생각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한 몸이라는 증거는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즐거워할 때 같이 즐거워하고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고 어려운 일 있을 때 같이 고민하고 같이 기도하는 모습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그리스도인들의 진짜 모습이다.
“함께 하는 것” 그리스도인들의 할 일이다.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어려운 일 있으면 같이울고 같이슬퍼하고 같이걱정하고 도와주고그것이 몸이 하나라는 증거가 입니다.
신앙생활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은 신앙생활은 외식과 무거운 짐이 되고,
불만과 불평이 가득하게 됩니다.
*[예화] 존 브로크만이 쓴 '지난 2000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이란 책이 있다. 인쇄술, 전기, 비행기, 컴퓨터, 인터넷 등을 포함한 인류의 121가지 위대한 발명품이 나열되어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의외인 것은 그 대단한 발명품 중에 지우개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지우개가 발명되면서 비로소 인류의 기록문화가 극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우개가 아니었다면 지구상 여러 위대한 예술가의 데생이나 스케치, 또는 시인과 음악가의 작품들은 모두 현재와 같은 완성도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위대한 작가 하나님의 작품인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실수투성이인 인생을 예수의 용서라는 지우개로 완성도 높게 만드신다. 그 지우개가 없었다면 우리의 인생은 늘 고칠 수 없는 실수로 얼룩졌을 것이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용서란 지우개로 우리는 걸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 때는 사랑이 식어가는 시대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는 시대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시대이다.
우리는 말로만 한 몸이 아니라 실제로 구원받은 한 몸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이웃을 그리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며 서로 용서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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