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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부 성경공부

장대 달린 놋뱀

by 언약의 지팡이 2024.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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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 달린 놋뱀

성경에는 예수님을 설명하는 다양한 표현과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이번 내용은 비교적 짧고, 단순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 내용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하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과 관련된 복음의 메시지를 더욱 확실하게 알고 또한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백성들의 원망 -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21:4-5)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정탐꾼들의 보고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광야에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20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곤 약속의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말씀하셨고(14:29-30) 그대로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방황한 시간들은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모두를 기록할 만한 가치가 없었는가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않은 구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죽고 이제는 거의 새로운 세대로 교체가 되었습니다. 민수기 21장의 내용은 광야 생활의 마지막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아론은 호르산에서 죽고 이제 그들 곁에 없습니다.

오랜 동안의 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셨습니다. 오랜 광야 생활에서 이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더욱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오랜 하나님의 동행과 보호에도 그들은 무감각해졌던 모양입니다. 에돔 땅을 둘러 행하는 땅의 길의 척박함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가는 길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그들의 감각은 둔감해져있습니다. 그들에게 만나는 더 이상 즐거운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원망의 이유 - 없는 것과 있는 것

식물과 물이 없었습니다. 박한 식물은 있었으나 그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엔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들의 육신적인 욕구는 너무나 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반복적인 원망은 바로 현재 우리의 신앙의 태도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광야에서의 반복적인 원망(고전 10:10)이 있었으나 주님은 인도하셨습니다(2:6, 136:16, 12:13, 2:10).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동행과 섭리와 보호하심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망하는 태도는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육신은 자꾸 불평을 토해냅니다. 상황이 좋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보다, 조금 좋지 않은 상황에서의 불평과 원망은 더욱 많습니다. 그러나 10개 중에 9개가 좋고 1개가 나쁘면 그 나쁜 1개에 연연하는 것이 본성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불행한 날보다는 평안한 날이 많음을 볼 때 우리는 더욱 감사가 넘쳐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선한 목자가 양을 인도할 때 양들은 목자를 신뢰하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면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겁니다. 우리는 성경의 예들을 통해 믿음으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3)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과 모세를 향한 원망

하나님은 원망의 본질을 잘 아십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한 원망은 사실 하나님께 한 원망이었습니다(21:5,7, 16:2,8). 이러한 일들은 사건들 이면에 계속해서 나타났습니다. 사무엘의 아들에 대한 핑계로 왕정을 요구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삼상 8:7).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사람을 통해서 하십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사역자였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수고했습니다. 모세는 수없이 불평하는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과 백성의 사이에서 중보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환경이 좋지 않으면 바로 모세를 향해 원망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 원망했습니다. 정말 은혜를 모르는 백성들입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이러한 상황을 잘 표현했습니다(1:2-4, 8:4-7).

하나님께 불평하고 대적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불행합니다.

-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에게 범죄의 원인을 돌리며 은근히 하나님을 원망한 아담의 태도는 옳지 않았습니다.

-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2:9)고 욥에게 이야기한 아내의 원망도 옳지 않습니다.

- 모세를 대적한 미리암과 아론의 행위도 옳지 않았습니다(12).

- 고라당은 그들의 직분에 대한 감사를 외면하고 모세와 아론을 대적했습니다(16).

- 죄인과 함께하는 예수님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원망했습니다(15:2). 그들은 외식하는 위선자였습니다.

- 멸망당할 사람들의 죄를 언급하면서 유다서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1:16).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우리의 원망은 없습니까?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여(all your heart) 의뢰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일부를 하나님께 향하고 나머지를 개인의 명철에 두거나 다른 대상에게 기대는 것은 안됩니다. 두 마음을 품으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한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12:2)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119:113)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를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10:2)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1:5-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하나님을 의뢰하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할 때 하나님은 길을 지도하십니다. 혹시 그 길이 돌아가는 길이라도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을 내 개인적인 유익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바라며 내 개인적인 소욕을 인내합니다. 개인이 조금더 피곤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부분적인 순종은 불순종입니다. 부분적인 의뢰나 의지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는 경영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원망은 하나님의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길 원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먼저 구하려는 태도에서 그렇게 되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막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어리석은 태도는 발람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발람은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기를 원했는데 나귀가 막았습니다. 주저하는 나귀를 때리며 재촉했습니다. 그는 어리석었습니다. 나귀의 주저함은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어리석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19:3)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고전 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혹시 주변에 있는 사람과 환경에 대한 원망은 없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는 복음의 전파와 사랑 안에서 하나됨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2:13-14)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우리의 소원인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서 우리는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행할 때 이 부분은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과 환경은 나를 위해 주님이 해주신 최적의 조건입니다. 내 사정을 주님은 모르거나 애써 외면하면서 계신분이 아닙니다. 주님이 아는 상황이라면 반드시 주님이 우리로 깨닫기를 원하시는 뜻이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현재 있는 내 환경도 주님이 허락한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지나면서 하나님께 대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내 곤란이나 어려움, 형편을 주님은 아십니다. 그 모든 상황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기대야 합니다.

또한 내 곁에 있는 형제, 자매님들은 모두 주님께서 나의 유익을 위해 주신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에 대한 불신과 원망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모든 상황들을 통하여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가 되지말고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5: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교회학교 내에서 간혹 사소한 일로 서로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일들을 봅니다. 우리는 이해력이 부족하고 속이 그리 넓지 못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열고 서로를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교회학교에서 일을 맡은 분들에게 일부 불편한 것이 있다면 더욱 기도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불완전한 연약함을 가지고 있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항상 유익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가끔 실수도 하고 잘 보지 못하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해하고 감싸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또한 일을 맡은 분들, 책임을 맡은 분들도 주장하는 자세를 갖지 말고 본이 되는 생활을 하는 가운데 더욱 주님께 기도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벧전 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고전 16: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그렇다면 거친 길을 따를 수 있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 보호와 인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육신적인 이익에 의해 주님의 길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2.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 원망한 백성들을 물은 불뱀들 vs. 장대 위에 달린 놋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에 민감해 질수록 우리의 생활은 더욱 규모있고 조심하는 삶을 살게 되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고, 또한 좋아하시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악인을 바로 멸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노하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악인도 심판의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호리라도 남김이 있다면 그는 결코 지옥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이번 과의 불뱀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라는 속성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보내서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얼마나 무서운 분이신지를 확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광야 생활 동안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하셨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셨는데 길을 조금 돌아간다고 해서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은 틀림없이 큰 죄입니다. 부모님께 대한 가장 큰 죄는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나나 물에 대한 원망, 길에 대한 불평은 어쩌면 사소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이들의 불평이면에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 혹은 존재에 대한 불신 등과 같은 것이 더욱 큰 죄로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근본적인 마음의 상태가 기회가 주어지니까 바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바르지 않았습니다.

(6: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뱀들을 보내서 심판하셨지만, 광야에서의 반복되는 범죄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약속하신 기업을 주려하고 계십니다.

- 놋뱀을 만들어 달라고 하신 명령은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고 낫고자 하는 자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 노아시대 물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때 120년의 기간을 주신 것도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한 방주안의 생명들을 위해 물을 물러나게 하시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 반복되는 범죄를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 인생 막대기와 사람 채찍으로 징계하시는 것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삼하 7:14, 3:12, 12:6).

- 구원받은 이후에 생활의 잘못에서 돌이키도록 말씀과 교제로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 실패한 인생을 회복시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베드로를 위대한 사도로 만들었습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유효합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원망했다면 놋뱀을 매달라는 명령은 없었을 겁니다. 그들의 회개와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부르짖으면 주님이 들어주십니다. , 주님은 적당한 때에 들어주십니다.

3. 하나님 다운 방법 : 물린 자마다 그것을보면 살리라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21:8-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갑작스런 뱀들의 출현으로 백성들은 온통 난리가 났을 겁니다. 죽은 사람에 대한 통곡,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 곁에선 사람들의 당황 등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은 아수라장이 되었을 겁니다. 이때 하나님의 명()에 의해 놋뱀이 만들어졌고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살 것이라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백성들의 반응과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봅시다.

- 뱀에 물려 죽게된 상황을 우연이라거나 혹은 다른 방법으로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놋뱀을 쳐다볼 수 없습니다. 절박한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이 쳐다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쳐다본 사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심한 상처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다 나음을 받았습니다. 당장 죽어가는 사람에게 놋뱀을 쳐다보라는 것은 정말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겸손하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라면 이것은 어려운 일도, 어리석은 일도 아닙니다. 가장 간단하고 쉬운 것입니다.

(고전 2: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농담으로 여기고 비웃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여 모두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다가 망했던 대표적인 사람은 아마도 롯의 사위들일 겁니다(19:14). 또한 노아시대에 의를 전파하는 노아의 전도를 무시했던 사람들도 망했습니다(벧후 2:5). 그리고는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29:1)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치료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바라보는 것도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물어죽이는 뱀이 무서워 그것을 바라보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일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놋뱀 자체에 무슨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놋뱀을 숭배하고 놋뱀에 제사를 했습니다. 이 놋뱀을 유다 왕 히스기야 때까지 가지고 다니며 섬겼던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이 놋뱀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면서 이것을 놋조각에 불과하다고 해서 느후스단이라고 일컬었습니다(왕하 18:4). 놋뱀 자체에 무슨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치료의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치료는 물린 자마다 그것을보면 살리라는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을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4.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그림자

 

뱀은 사탄 혹은 마귀를 상징합니다.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뱀에 물려 죽게된 상황은 아담 때부터 모든 사람이 사탄에게 물린 것을 의미합니다. 뱀의 독이 퍼진 것처럼 죄의 독도 퍼져오고 유전되어오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의 독이 퍼져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은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위해 심판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뱀에 물린 사람을 인간 편에서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심판을 의미하는 놋으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도록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비참하게 저주받아 심판을 받는 사람들을 위한 사형 틀입니다. 놋뱀을 만들어 단 것은 예수님이 가장 비참한 죄인의 모습으로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 달린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저주받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으며 그 일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셨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9:13, 딤전 1:15).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 말씀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려서 하늘과 땅 사이에 들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우리 대신 심판받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됩니다.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놋뱀을 보고 산 것처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마음으로 쳐다볼 때 내 죄가 거기서 심판받았다는 것과 죄와 사랑의 권세가 정복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믿는 순간에 깨끗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믿는 다는 것은 마음으로 쳐다보는 것입니다(1:29, 45:22).

믿음이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인 것을 마음으로 쳐다보는 것입니다. 우리 죄와 죄로 인한 모든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 지시고 죽으셨음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지해서 보는 것입니다. 믿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개인적인 것이었습니다.

뱀에 물린 사람의 간절한 기도에 의해 낫는 것이 아닙니다. 곁에서 간호하는 사람의 정성에 의해서 낫는 것도 아닙니다. 가족 중에 놋뱀을 쳐다보고 나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낫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나았다고 해서 뱀에 물린 자식이 낫는 것도 아닙니다. 뱀에 물린 개인은 놋뱀을 개인적으로 쳐다보아야 삽니다. 우리는 물린 자마다라는 문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개인적인 것이어야 합니다(3:16, 6:40, 13:39).

우리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대안인 예수님을 보고 개인적으로 사랑을 받아들어야 합니다.

5. 책임

 

놋뱀을 바라보곤 죽음에서 산자는 다른 죽어가는 사람을 내버려두어서는 안됩니다. 자기는 살았는데 자기 가족이나 이웃이 죽어가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또한 사는 방법이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자기 고집과 불신으로 거부하는 죽어가는 자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야 합니다. 산자는 그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파숫군의 책임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3:17-19).

(20:26-27)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왕하 7:9, 4:19, 8:20-22)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28: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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