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Ⅰ. 개요
일단 ‘예배’의 원어를 찾아 그 의미와 용법을 참고해보고, ‘예배’란 무엇인지 정리해 보도록 하자.
latreiva(라트레이아)
(하나님을) 섬김 또는 예배 service or worship.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라트레이아(Pind. 이래)는 라트류오(latreuvw, : 섬기다, 봉사하다)에서 유래했으며,
(a) 첫째는 '보수나 보상을 위한 봉사'를,
(b) 그 다음에 '봉사, 일, 수고, 노동, 육체적 돌봄'을 의미한다.
(c) 결국 후기에는 제의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신들을 영화롭게 함, 예배'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2. 구약성경의 용법
라트레이아는 70인역본에서 9회 나오며, 일반적으로 제의적인 예배를 언급하거나(수 22:27), 혹은 단일한 제의적 행동을 언급하는데(출 12:25, 유월절) 사용된다. 마카베오서에서 이 단어는 마카베오삼서 4:14(강제노동)을 제외하고는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다(마카베오일서 1:43; 2:19,22).
3. 신약성경의 용법
라트레이아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라트레이아는 3회 구약성경의 예배(희생제사) 사역을 나타낸다.
롬 9: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히 9: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히 9: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b) 요 16:2에서 희생제사를 암시하고 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여기서 복음을 미워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증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면서 이를 하나님 "섬기는" 예라고 생각한 봉사의 의미로 나타난다.
(c) 롬 12:1에서 은유적 의미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이 제사를 로기케 라트레이아(한글개역 "영적 예배")로 묘사하는데, 곧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하는 예배는 분명히 세상과는 구별되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내적 생활과 외적 행위로 되어 있다. 이것은 그들이 드려야 하는 산제사이다. 인간이 이성과도 일치하며 또한 그 안에서 신적인 이성도 작용하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service)를 말한다. 만일 사람이 이 이성의 음성을 듣는다면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service)이다는 것을 반드시 알게될 것이다. 제의적 용어 라트레이아의 성경 역사(歷史)는 이 본성(내부)에서 그 절정에 달하는데, 가장 포괄적인 구체화이며 신 10:12이하의 그 최초의 예언적 기사를 다시 취하는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K.Hess; H.Strathmann).
4. 예배와 예배의식에 대해서
예배 의식은 일종의 제사 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명절에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정말 조상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줄로 알고 하는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과거부터 그렇게 제사를 지내 왔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주위의 시선이 두려운 까닭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행동의 표준을 성경에 두어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아니면 관습대로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행해지는 예배 의식들은 성경에는 없는 것들입니다. 거룩하게 보이기 위해서 입는 옷이나 꾸미는 말, 각종 행위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진짜 예배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예배 ‘의식’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마음대로 살다가 주일에 예배당에 찾아와서 경건한 모습을 꾸미며 예배 의식을 행하고 다시 세상에 나가서 마음대로 살아가는 일을 반복합니다. 이것은 과거 이교(異敎)적인 습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주일에 한 번씩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요 4:24)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해야 합니다. 이는 거듭난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이라는 말은 성령과 진리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 가운데 사는 모든 생활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입은 사람은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제사로 드릴 것을 말합니다. 자기 몸을 드린다는 것은 이 세대를 닮지 말고 그들과 구별되어 말씀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생활이 곧 참된 예배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말씀을 배우는 것은 그 자체가 예배의 일부도 되고 또 예배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됩니다. 예배는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참조: 모든 해답은 성경에 있다 Ⅱ)
Ⅱ. 교훈 및 적용
(겔 22:26)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겔 22:30)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예배란 구원받은 사람의 당연한 구별이요, 다름입니다.
위의 에스겔 22장 26절의 ‘더럽혔으며’라는 구절은 ‘같아졌다. 평범해졌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이 세상 사람들과 같아진다면 -생각이나, 행동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세상 속에서 다르게 살아가는 것인지를 분별하고 그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며, 이 무너져가는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소금과 빛이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오늘 ‘말씀’앞에서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합시다. 그 구별됨의 방향이 무엇인지 분변키 위해서.
오늘 ‘무륲’을 꿇고 인도하심을 구합시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그리고 바로 오늘 이후로 우리의 구별됨을 드러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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