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세마네 (Gethsemane)「착유(擇油)」
아람어로 ‘가트 쉐멘’ (기름짜는 틀, 올리브 맷돌)의 헬라어 음역. 예루살렘 부근에는 올리브에 관련된 지명이 많은데, 이것은 올리브 재배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이곳은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시내 건너편 감람산 서쪽 기슭에 있는 동산(요18:1)으로 예수께서 습관을 따라 기도하시던 곳(눅22:39,40)이며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자진하여 사로잡힌 곳이다. 신선한 기름이 그에게서 흘러나와 모든 사람들에게 공급될 수 있도록 우리의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기꺼이 짓밟히시고 분쇄되셨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는 4복음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겟세마네'의 이름을 명기하고 있는 것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뿐이다(마26:36,막14:32).
<개요>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잡히시기 직전(목요일 깊은 밤)에 있었던 사건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보여주신 모습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짊어지신 죄의 무게가 얼마나 크며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더욱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적인 고뇌와 번민에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인간들이 지은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를 나타내는 것이며 그로인한 고통이 어떠할 것인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철저히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니셨고 동일한 고통을 느끼셨기에 죄에 대한 형벌 앞에서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근심에 싸인 채 시련과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비참하게 고함을 지르며 거친 말을 퍼부어 대지도 않았다. 성자로서 하나님의 제 2위격이신 예수님은 인간으로서는 결코 선택할 수 없는 십자가의 고난을 기꺼이 선택하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1. 습관을 좇아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습관을 좇아 기도하러 감람산에 가셨다(눅22:39-40). 예수님께서는 평소 기도의 본을 몸소 보여주셨으며 특히,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는 꼭 하나님께 진지하게 아뢰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며 한 사람의 인격형성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수님의 기도습관은 하나님을 철저히 의뢰하는 주님의 성품과도 연관된다. 어떠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가는 반드시 습관을 통해,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난다. 나는 어떤 습관, 어떤 인격을 가지고 있는가?
주님의 기도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습관에 대하여 생각해보도록 하자.
주님이 보여주신 좋은 습관과는 대조적으로 말씀 가운데 나타난 사람들의 습관은 대부분 좋지 못한 습관들이다.
(삼상2:12-14)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 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렘22: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고전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히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리스도인으로서, 교사로서 나는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는가? 매일의 삶 속에서 먼저 기도하며 묵상하는 습관을 갖고 있는지, 좋은 언어습관을 가지고 있는지, 주님의 목소리를 청조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또한, 내가 습관적으로 가는 곳은 어디인가? 가룟 유다는 주님을 팔 마음으로 주님을 찾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항상 가면 만날 수 있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주님이 기도하는 곳이었다. 나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할까? 말씀이 전해지는 곳, 교사모임, 교제장소인지 아니면 별로 유익하지 못한 곳인지 생각해보자. 설령 교제의 장소에 있더라도 제 시간보다 늦은 시간에 가야만 만날 수 있지는 않는가? 지각하는 습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주님이 몸소 보여주신 좋은 습관은 우리가 어떠한 습관과 인격을 가져야 할 것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2. 곤란 가운데서 기도하신 예수님
(마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주님은 심히 고민하셨고 슬퍼하셨다. 주님의 고민은 단지 죽음에 대한 공포는 결코 아니었다. 온 인류를 대신하여 죄를 담당하셨기에 죄의 무게로 인한 고통인 것이다. 죄가 큰 만큼 주님이 담당해야할 고통 또한 컸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함께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주님을 위해 죽음을 각오했던 베드로에게 주님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 함께 있어 기도하라는 말씀은 결코 무리한 명령이 아니었다.
(마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주님은 가장 고통스러울 때 기도하셨다. 어떠한 문제도 기도로써 아뢰어야함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극복하기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 어떠한 행동을 하는가? 스스로 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가? 아니면 답을 줄만한 사람을 찾지는 않는가? 말씀은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주님은 몸소 행해 보여 주셨다.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약5: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기도는 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무서워하고 있을 때 사용했던 해결책이었다. 기도는 히스기야가 산헤립의 위협하는 편지를 받았을 때 사용했던 해결책이었다(왕하19:14). 기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계시는 동안 사용하기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던 해결책이었다. 환란 가운데서 위로를 원한다면 우리도 마땅히 주님의 처방을 따라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다른 어떠한 위안의 방편들이 있다할지라도 우리는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도움을 구하는 첫 번째 친구가 마땅히 하나님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금 나아가사’ (마26:39), ‘돌 던질 만큼 가서’ (눅22:41)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기 위해서 그들의 면전에서 물러나셨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옛말이 있지만, 주님 앞에 고통당하는 영혼은 한숨과 탄식의 상한 언어를 이해하시는 하나님과 함께할 때 가장 안락한 편안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통하여 은밀한 기도는 반드시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된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다.
3.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신 예수님
(마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어떠한 마음과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 속에는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담당해야할 죄의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가 나타나 있다. 만약 이렇게만 아뢰고 기도를 마쳤다면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시며,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하나님의 아들(聖子)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복함으로 이겨내셨다.
주님께서 기도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먼저 자신의 뜻을 솔직하게 아뢰고 나서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것보다 앞세우는 기도를 해야 한다(마6:33).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함으로 그렇게 해야 하며 모든 기도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마무리되어야 한다.
곤고함과 곤란함이 있을 때 자신의 처지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뜻만을 아뢰기에 급급해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도록 하자.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수적이며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갖추는데도 필수적인 것이기에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 속에서 반드시 실천되어야 한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마26:39) ‘무릎 꿇고’ (눅22:41)
주님은 기도하시는 모습에서부터 철저히 순복의 자세이셨다. 얼굴을 땅에 대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철저한 겸손이며 두려움의 표현이었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성도의 마땅한 자세인 것이다. (느8:6, 겔44:4, 단8:17)
또한 무릎을 꿇으신 것도 하나님 앞에 아뢰는 마땅한 자세이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철저한 순종과 복종의 외적인 표현인 것이다. (왕상8:54, 라9:5, 단6:10, 행9:40, 행20:36)
내적인 자세가 중요하지만 외적인 자세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먼저 마음으로 순종하고 그것을 우리의 외적인 모습에 나타나도록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26:40)
만일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잠자고 있었던 것처럼 이때 주무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주님을 잡으려고 대기하고 있던 그의 원수들도 깨어 있었는데 말이다(막 14:43). 마땅히 그와 함께 깨어 경계하고 있어야 했던 그의 제자들은 잠자고 있었다. 그가 그들에게 기대하셨던 것은 얼마나 하찮은 일이었는가? 그는 단지 그와 함께 깨어 있기만을 요청하셨다. 만일 그가 그들에게 어떤 큰일을 하도록 명령하시거나, 또는 그와 함께 죽기를 요구하실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마26:33). 그러나 정작 그가 그와 함께 깨어 있기만을 바라셨던 그때 그들은 자고 있었다. 주님께서 깨어 있기를 기대하셨던 시간은 얼마나 짧은 시간이었는가? 단지 한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경계하고 있어야 할 하룻밤 동안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지를 못했다. 죽기를 각오한 베드로의 다짐은 깨어있으라는 명령조차도 이루지 못할 다짐이었던 것이다. 스스로 결정한 그리스도인의 다짐은 완전하지 못하고 오래가지도 못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마26:41)
시험을 받는 것과 시험에 드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다가오는 시험을 막을 수는 없으나 시험에 들어서는 안 된다. 시험을 당하는 것은 괴롭고 무서운 시련이지만 시험에 드는 것은 죄이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하며 깨어있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26:41)
참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단지 위로를 주시기 위한 말씀은 아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은 서로 원수가 된다(갈5:17). 원수에게 이길 수 없으면 그냥 항복해야 하는가? 이길 방법을 찾아볼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더욱 기도함으로 깨어있어야 됨을 가르쳐 주고 계신다.
<정리>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습관이 되어야 하며, 특히 고난 중에 더욱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단지 내 뜻을 하나님께 아뢰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골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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